향기 치유, 향의 역사, 향기 문화

중국의 향, 향기 문화 역사 본문

향기 치유, 향의 역사, 향기 문화

중국의 향, 향기 문화 역사

사이앱 2022. 7. 31. 08:02

중국의 향, 향기 문화 역사

중국의 향, 향기 문화 역사
중국의 향, 향기 문화 역사

천자와 향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중국 당나라에서 만들어진 개원 궁중 향이란 향을 들어보셨는지요? 개원은 양귀비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당 현종 시기에 사용된 연호입니다. 개원 궁중 향은 당 현종 시기 궁에서 만들어진 향인데 향성과 약성, 모두가 뛰어난 향이라고 합니다. 주가 주라는 사람이 쓴 향승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 향은 침향, 단향, 사향, 용뇌 향, 갑향 등을 섞어서 만든 복합향입니다. 환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환 고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주로 분향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국에서 향은 황실에서 특별히 제작해서 사용할 만큼 수요가 많았고, 또 향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해도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의 향 사용 역사

중국에서 향의 사용은 매우 빨라서 지금부터 7,000년 전의 유적에서 분향한 제단의 흔적이 발굴된 바 있습니다. 이 제단에 관해서는 중국 사서오경 가운데 하나인 예기에 따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거대한 제단이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향을 처음 사용할 때는 신을 섬기기 위해 분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을 섬기는 향을 바치는 존재는 바로 황제였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천자라고도 불리었는데 이는 황제라는 칭호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면, 천자는 하늘이 인간 세상의 통치자로 선택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천자는 능력과 더불어 신성함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죠. 그래서 향은 원래 중국에서 신과 인간 세상의 신성한 존재였던 천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향이 인간의 영역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00년 경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도 질병의 치료에도 사용되었고, 불교의 전파에 따라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중국에는 향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도가 찻잎과 다기, 차를 우려내고 마시는 방법 그리고 예절을 포괄한다면 향도는 향료와 각종 향구, 향을 음미하는 방식과 절차를 포함하는 문화입니다. 향도는 한때 중국에서 다도 못지않게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향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용기의 사용입니다. 일찍부터 도기 문화를 꽃피웠던 중국에서는 향료를 담기 위한 다양한 용기들이 제작되었는데 토기에서부터 중국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자기, 콧구멍에 바짝 대고 향을 즐길 수 있는 비연 호라고 불리는 소형 향료 병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용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향은 처음에는 천자와 하늘을 이어주는 권력의 상징이었으나 이제 사대부 계층에게는 심미의 도락, 소박하고 자유로운 독서인에게는 안빈낙도의 벗이 되었습니다. 중국 불세출의 시인인 굴원과 소식, 그리고 성리학의 주창자인 주자를 비롯한 역대 문인 거장들이 향을 노래했고, 시경과 주례, 나아가 홍루몽 등의 고전에도 향이 나옵니다. 본초강목, 명의 별록과 같은 의서에도 침향의 효험을 예찬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장목을 증류하여 얻는 장뇌유, 장뇌 유보다 향이 짙고 우아한 용뇌유, 최고품으로 분류되는 사향, 침 단향 등의 다양한 향이 민간에서도 제조되고, 이는 국제적인 교역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황궁의 기둥은 향나무를 사용하기도 했고, 백 단, 유향 등을 발라 건물 전체에 향이 풍기게 했습니다. 소녀에게는 정차, 감송향, 청목향, 규심, 당귀, 사향 등의 향을 잘게 부수어 꿀과 섞어 환을 만들어 장복시킴으로써 방향 미인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최상급 향료인 용뇌 향은 주로 황제에게 진상되었습니다. 중국에서 향의 사용은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형태가 나타나 진, 한대에 성장하고, 수, 당대에 성숙하며, 송나라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명, 청대까지 지속됩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대외교류가 활발하지 않았고, 또 중국의 토양은 향료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하지는 않아서, 토착 향료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 시기의 향은 제례나 권력과 관련된 것이 많았고, 다양한 종류의 향이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많이 사용된 향은 택란, 난초의 일종인 혜초, 쑥, 울금 등으로 훈의, 향냥등에 넣어 패용하거나 탕으로 끓여서 음용하였다고 합니다. 술을 담아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초나라의 대신이었던 굴원이 유배지에서 쓴 이소라는 시에는 일상생활 속의 각종 향료들이 언급되고 있음으로 보아 서민계층에서도 향이 사용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진, 한 대에 이르면 영토가 동남아 접경지역까지 확대되고, 실크로드가 개척되면서 서역과 동남아시아의 향이 전래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도교가 융성하면서 향도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침향, 소합향, 계설향 등은 이때부터 고급 향으로 황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유행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가 오나라에 의해 목숨을 잃은 후 그 목을 조조에게 보내자, 평소 관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던 조조는 침향으로 관우의 몸을 만들어 낙양성 남쪽에 제사 지냈다고 하죠. 또한 관우의 복수를 위해 유비가 출병하자 오나라의 손권이 당시 부하에게 배신당해 죽음을 당한 장비의 목을 침향 상자에 넣어 유비에게 돌려주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화는 당시 향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향로 외에 향낭과 침구 넣는 향로도 유행하였고, 나아가 향으로 심신을 조율하는 향방의 개념이 나타나 향 문화가 심화됩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향로인 박산로가 처음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전쟁이 계속되던 시기입니다. 비록 전란은 지속되었지만 향의 사용은 오히려 증가했고, 향 문화는 더욱 발전했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향 문화

위진남북조 시대에 중국의 토착 신앙인 도교와 외래 신앙인 불교가 융합됨으로써 새로운 민간 신앙이 탄생하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 양나라의 무제는 천제에서 처음으로 아주 귀한 침향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후 중국 황제들은 제천의식에서 분향할 때 침향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황제가 분향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향은 용연향과 침향입니다. 참고로 분향을 가장 많이 한 황제는 수양제로 향을 태산처럼 쌓아 올려서 분향을 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조금 전에 본 양 무제, 한 무제, 당 현종 등의 황제가 분향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 전란에 지친 중국 사람들이 도교와 불교에 심취하면서 향의 사용이 증가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향이 심신의 조율을 넘어서 마음을 달래고 치유하는 단계로 발전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이 시기 중국에서 향사용의 또 다른 특징은 여러 종의 향기를 배합하는 향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향은 단일한 향료가 아닌 여러 종류의 향료를 향방에 따라 섞은 향품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향품은 후에 여러 향을 조화시켰다고 해서 화향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 중국의 향 문화는 극도로 사치스러워집니다. 이는 수와 당이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통일 왕조를 이루어 내면서 중앙권력의 강화와 경제적 풍요를 이룩한 결과였습니다. 이때의 향은 손님 접대용, 침실용, 서재용, 사무실용, 심신 수련용 등으로 구분될 만큼 세 분화되고 다양해졌으며, 불가의 향도, 도가의 향도 등 각종 문파의 향도가 나누어지기도 했습니다. 향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침향 구하기가 미인 구하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수양제는 분향을 좋아했는데 길일에도 분향을 하곤 했습니다. 한 번 분향할 때마다 열 수레의 침향을 사르게 해서 온 황성이 침향 향기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한편 서양에서 향을 많이 사용한 여인이 클레오파트라라면 중국에서는 양귀비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당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는 몸에 독특한 채취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없애기 위해 목욕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당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서 화청지라는 목욕탕이 딸린 별궁을 짓기도 했습니다. 양귀비도 목욕을 할 때 탕에 장미를 비롯한 꽃을 가득 넣었다고 합니다. 또한 평소에도 향낭을 지니고 있어서 늘 좋은 향기를 풍겼다고 합니다. 앞서 수양제의 사치가 수나라가 단명한 이유 중의 하나라면 당 현종의 사치는 당나라가 쇠약해지는 원인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송나라 시대의 향 문화 전성기

송대에 이르러 중국의 향 문화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송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상업이 발달한 왕조였습니다. 이 시기 상업은 백성들에게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고, 백성들의 일상문화에도 상업화가 깊이 침투하였습니다. 예컨대 경제적 풍요에 기초해서 연회 문화가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정에서 연회를 개최할 때 연회 음식을 직접 만들지 않고, 요리사를 초빙해서 조리하여 손님에게 제공하는 현재의 출장뷔페와 같은 요식업의 상업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차와 향과 같은 사치품의 소비도 크게 늘어나서 향 문화와 차 문화의 전성기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홍추라는 사람이 홍 씨 향보 등의 향보를 저술하였고, 향도에 관한 백과사전들도 저술되었습니다. 남방의 해상 실크로드는 향료 무역의 루트가 되어서 향료 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 시대 문인들은 난과 꽃으로 장식된 방에서 벽에 걸린 명인의 시화를 감상하면서 향을 피워 그 향기를 맛보고, 차를 음미하는 것이 전형적인 풍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차를 즐기는 중국인들은 차에 꽃잎을 띄워 그 향을 더욱 그윽하게 했고, 부유한 여성들이 비단으로 만든 향낭을 패용한 것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도 옷에 향료를 뿌리고, 머리에는 사향 등의 향료를 발랐다고 합니다. 방에는 선향을 피워 향내로 방이 가득하였습니다. 또 이 시기에는 오늘날 일본 향도의 주요 방식인 격화 훈향이 유행했는데 이는 향료를 직접 불사르지 않고, 운모 등으로 만든 얇은 막을 불 위에 놓고, 그 위에 향료를 놓아 훈증하는 방법으로 연기가 나지 않으면서 향과 기운을 즐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심지어 향투라고 해서 누가 향을 잘 피우는지 시합을 하기도 했습니다. 명·청대에 이르러서는 외국과의 교류를 막기 위해 해안선을 봉쇄하고 외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해금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향의 수입이 줄어들게 됩니다. 따라서 중국의 향 문화는 소박함이 강조되는 향 문화로 바뀌게 되고, 근대 이래 서구문물의 수입으로 쇠퇴하게 됩니다. 최근 중국에서는 향도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면서 과거의 향 문화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향 제품도 많이 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과거의 향 문화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Comments